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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의 맏아들이자 전시과를 제정한 고려 5대 왕 경종

Condor-K 2021. 5. 18. 12:19

경종은 고려의 제5대 임금이며 묘호는 경종, 시호는 헌화대왕, 휘는 주, 자는 장민이며 광종 대성대왕의 장남이자 공인된 후계자였습니다. 모후는 대목왕후입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 태어난 첫번째 임금으로 20살에 즉위해 26살에 요절한 청년 군주였습니다.

 

 

 

마음이 굳세지 못했고 음주가무를 좋아했지만 정종, 광종의 대숙청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 속에 빠진 조정을 안정화시키고 전시과를 시행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습니다. 경종은 광종의 숙청 기간과 성종의 발전기간 사이에 있는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고 이 기간 동안 경종은 무난하게 정치를 펼치며 성종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경종의 가족관계

왕후 넷 모두 사촌관계입니다. 1번째 왕후는 현숙왕후 김씨로 경종의 고모 낙랑공주가 경순왕과 혼인해 낳은 딸로서 경종의 고종사촌입니다. 2번째 왕후는 헌의왕후 유씨로 경종의 삼촌인 문원대왕의 딸로서 경종의 사촌입니다. 제3비와 제4비는 자신의 작은 아버지이자 외삼촌 되는 대종의 딸들입니다. 제 3비는 천추태후로 유명한 헌애 왕후로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을 낳았습니다. 제 4비는 헌정와후 경종이 빨리 승하한 탓에 언니와 동생이 여러모로 남자 문제로 물의를 빚었습니다. 후궁인 대명궁부인 유씨는 자신의 고모 흥방궁주와 태조와 제6비 정덕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원장태자의 딸입니다.

경종의 생애

아버지 광종의 호족 숙청 작업으로 인해 차기 후계자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 이유는 광종이 호족들이 태자를 등에 업고 난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한 탓에 항상 태자를 의심하고 경게하여 야단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숙청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경종이 광종의 살아있는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어머니인 대목왕후 덕분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아녀자의 손에 자랐다는 것은 어머니나 외가 쪽 세력의 보호 아래서 자랐습니다. 천성이 총명하였으므로 후회와 과실을 면했다는 부분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975년 광종이 향년 51세의 보령에 붕어함으로써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선왕이 피를 너무 많이 묻혔고 자신 역시 늘 위혐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탓에 공포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사회전체가 원한이 판을 쳤던 탓에 경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한 일은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호족과의 화합 정책을 펼치는 것이였습니다. 호족 출신의 왕선은 집정으로 채용하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 표창도 많이 하는 등 백성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왕선이 건의한 법안인 호족들에게 합법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법안인 복수법을 통과시키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경종이 법안을 통과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일단 경종이 효도를 강조했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건데 진짜 복수법이 옳다 생각하고 승인했을 여지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버티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는 왕선과 호족세력이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 와중에 경종의 삼촌들이 이 법에 얽혀 살해당하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복수법의 폐단이 우후죽순 번지자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종에 의해 입안자인 왕선은 파직된 뒤 지방으로 쫓겨났고 이후 사적인 복수를 행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하는 동시에 복수법을 없애버렸습니다. 이 정책으로 인해 다음 왕인 성종 시대에 등장한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서 까이게 됩니다. 경종은 이후에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 체제를 확립시켰는데 조선시대까지 쓰이게 될 정도로 합리적이였습니다. 광종시절에 자리잡은 과거 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면서 꽤 안정적인 정치를 펼쳐나갔습니다.

 

 

 

말년에는 주색과 바둑에만 몰두하여 정사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는데 공포 정치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도니 호족들 사이에서 전쟁 그리고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노는 소년이 된 만력제와도 비슷한 부분입니다.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동생 정윤 개령군 왕치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는 유조를 남긴 뒤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붕어했습니다.

전시과 제정

복수법이라는 실책을 저질렀고 말년에는 정사를 멀리하며 주색에 탐닉하는 등 놀고 먹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후대의 평가는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며 불우한 유년기로 인해 그를 동정하는 여론도 많았습니다. 전시과라는 훌륭한 제도를 성립시켰다는 점을 볼 때 꽤 유능한 군주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경종의 뒤를 이은 성종 대부터 고려는 본격적으로 안정된 왕조 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묵종 때의 일을 예견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후계자가 있었음에도 나이가 어려서 왕위 계승 분쟁을 우려한 것인지 사촌이자 메부인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줬는데 성종은 지방 제도와 여러 업적을 남기고 고려 행정체계의 기초를 닦고 유학 중심의 정치 체제 확립에 노력을 기울이는 등 경종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