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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강화를 위해 노비안검법을 제정한 광종

Condor-K 2021. 5. 17. 12:18

고려왕조의 제 4대 황제인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고려 국왕들의 통치기반을 다졌으며 과거제와 노비안감법을 실시하는 등 고려 왕조의 기틀을 잡았으나 호족을 숙청하고 재위기간 동안 공포체제를 이루어서 폭군이라는 평가받기도 하였습니다. 태조의 넷째아들로 신명순성왕태후의 소생으로 왕건과 신명순성왕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들 중 셋째입니다.

 

 

 

광종은 집권 초반부에는 호족 세력들과의 융화를 추구하는 행보를 보이다가 중반부 부터는 노비안검법, 과거제도시행, 고려의 변두리로 취급받았던 세력들을 중용하는 등의 방법들을 통하여 호족의 힘을 철저히 누르는 한편 모든 권력을 왕에게로 집중시키는 전제화 정책들을 밀어붙였습니다. 후반부에는 아예 무차별적인 숙청을 통해 고려를 그야말로 임금에게 맞서거나 임금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을 산 사람은 누구도 무탈할 수 없는 공포의 시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광종 즉위 전

본명은 왕소이며 형들 중 이복 형이자 첫째 형인 왕무는 태조 사후 즉위한 혜종입니다. 광종에게는 모후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에게서 난 동복 형이 둘 있었는데 맏형이 태자왕태 둘째형이 고려3대 왕인 정종 왕요입니다. 왕태는 정황상 요절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밑으로는 문원대왕이란 시호를 받은 왕정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증통국사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이었기에 형처럼 충청도가 연고지가 되었겠지만 아들을 잃은 신주원부인 강씨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달라졌습니다.

 

신주원부인 강씨는 신주 강씨로 패서 계열의 호족 세력이었으며 패서호족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딸이자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대목왕후 황보씨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정종은 충주와 함께 충청도를 양분하던 청주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당시 청주 지역의 대호족이었던 김긍률의 딸인 청주남원부인 김씨와 결혼해 충청도를 묶어 후견 세력으로 만드려 하였습니다. 넷째인 탓에 즉위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정종이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 4년만에 붕어하여 25세 정종에게 왕위가 넘겨졌습니다.

광종 즉위 후

광종은 고려 초기 여러 세력들이 왕권 다툼을 벌이는 혼란 속에 집권하여 왕권 강화를 시도하였는데 이를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펼치면서 고려 왕조의 기반을 단단히 다진 임금입니다. 불교를 장려하고 민심 안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당시의 지배층인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수단을 강구하여 호족들과의 전면 대결에 나섰습니다. 호족들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호족들이 소유한 노비들 중 원래 양인이었지만 강제 및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다시 양인으로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고려의 지배층을 이루며 호위호식하던 수많은 호족들은 후삼국 시대의 전쟁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지고 이를 갚지 못한 것 등의 이유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당시에 관념상 노비는 당연히 재산 취급을 받았는데 소유물을 넘어 소작농 겸 사병 역할까지 도맡아 하였기에 호족들의 중요한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노비안검법 실시를 강행하였습니다.

 

광종은 중국의 마지막 오대 왕조인 후주출신으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방문했던 쌍기를 귀화시킨 뒤 발탁하였고 쌍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958년에 호족들의 직위 세습을 막고자 이미 중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과거제를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실시하였습니다. 중국에서 과거제가 최초로 정착된 수나라와 당나라가 그랬듯이 귀족적 관료제의 특성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과거제 실시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한반도에 관료제 국가를 확립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958년 도입된 과거제는 이후 900년 넘게 실시되었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습니다.

 

광종의 공복 제정은 고려 왕조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고려 국왕이 주도하는 조정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고려가 실정에 맞춰 의복제도를 고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선례가 되었습니다. 공복 제정을 통해 호족들의 사치를 제한하는 효과도 있었는데 사실 광종의 공복 제정은 호족의 사치를 제한하는 효과를 노리고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호족들은 공복 제정에 저항했으나 광종이 공포정치를 시행하고 이 와중에 호족 대숙청을 감행해서 공복 제정에 저항하던 호족들은 버티게 되었습니다.

칭제건원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고 한국사 역대 군주 중 최초로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면서 자주 의식을 표방했습니다. 이전에도 신라나 발해의 다른 임금 대에도 비공식적으로 임금을 황왕, 황상이라 칭하는 등 소극적으로 칭제건원을 했지만 광종처럼 노골적으로 황제국임을 선포한 적은 없었습니다. 칭제건원 이후 북송과 거란이 외교상으로 격한 항의를 해왔고 위의 외교 항목에서 언급했듯 북송과의 외교 관계를 독독히 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칭제를 포기하고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려는 광종뿐만 아니라 원 간섭기 이전까지 비공식적으로 임금을 황상이나 성상이라 부르며 소극적인 칭제를 꾸준히 했으며 최강대국인 거란과 송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에서는 고려 국왕을 해동천자라 표현하는 등 사실상 칭제했습니다.

 

 

 

소도 제도 개편

고려사 세가에 따르면 광종은 개경을 황도, 서경은 서도로 개칭합니다. 국가의 두 수도를 높여 자신의 권위를 중국황제와 맞먹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유교적 예법에 따른 수도 구분은 천자는 경과 부를, 제후는 부만 설치합니다. 고려는 경과 주를 사용하였는데 광종은 도를 도입하여 그보다도 높힌 수도 제도를 사용합니다. 이 제도는 도가 경으로 돌아왔어도 개경은 상도, 서경은 웅도등으로 불리는 등 자주 쓰이는 별칭으로 여전히 남았고 이후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할 때도 영향을 주어 새로운 수도가 강도로 명명됩니다.

불교 통합

정작 호족들을 쓸어버린 이후에는 뭔가 죄의식이라도 느꼇는지 절을 세우고 그들을 위한 제를 자주 드렸다고 합니다. 잦은 불사로 인해 이 당시 승려를 자처한 땡추들의 횡포가 극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원래 글쓰는 유학자는 불교가 조금이라도 세속화되면 죽일 기세로 물어뜯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상은 최후의 최후까지 광종이 호족들을 견제하련느 수단으로 절 건설에 대한 모든 것을 왕실에서 지원하고 죄다 개경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만들어 승려 세력들로 하여금 왕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사원들은 훗날 희종과 함게 최충헌을 없애려 했다가 실패해 최충헌에게 승려들이 전부 몰살당하고 사원들도 죄다 철폐되면서 고려 불교의 성격 또한 교종 중심에서 선중 중심으로 바뀌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