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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동생인 고려3대왕 정종

Condor-K 2021. 5. 16. 08:09

고려의 제3대 황제인 정종은 태조 신성왕의 셋째 아들이며 묘호는 정종, 시호는 문명대왕, 휘는 요, 자는 천의, 이름부터 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는게 보입니다. 왕의 이름에 임금 요자는 고려가 망할 때까지 피휘에 따라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글자 대신 삼국유사 고조선 기사에서의 예와 같이 높을 고자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에서 태어난 1번째 임금으로 23살에 즉위해 27살에 죽은 청년 군주로 강력한 뒷배경을 바탕으로 대숙청을 시작한 임금입니다. 왕실과 호족간의 대립이 지속되며 건강이 악화되었고 동생 광종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최후를 맞았습니다.

 

 

 

태조의 세번째 아들이지만 둘째 형인 왕태가 요절했기 때문에 차남의 대우를 받으며 컸습니다. 혜종 1년에 세워져 징효대사탑비에는 왕요군으로 등장합니다. 왕자 시절 별다른 작호를 받지는 ㅇ낳은 듯하고 훗날 즉위하는 왕소의 동복형으로 유약한 면이 있었던 이복형인 왕무와 달리 야심이 많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혜종은 박술희, 왕규와 같은 친위 세력을 제외하고는 지지 기반이 없던 혜종과 달리 어머니, 장인, 누이뿐만 아니라 왕식렴등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하였습니다.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왕규는 초반에 무리하게 왕요와 왕소 형제를 제거하려 했다가 혜종의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박술희는 왕규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혜종의 세력은 하나로 뭉쳐도 될까 말까한데 분열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혜종은 외가인 나주 오씨 가문이 왕건의 달느 자제들의 가문에 비해 한미한 편인지라 지지 기반이 미약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늘 불안에 떨어야했고 잣니을 암살하려 한 자객을 체포하고도 취조하기는 커녕 책임조차 묻지 못하였습니다.

 

정종은 이미 든든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즉위했기 때문에 의욕적으로 왕권 강화를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정종은 혜종이 즉위하던 시절에 왕규에게 역적이라고 찍히고도 무사할 정도로 기반과 세력이 강했습니다. 강력한 호족이었던 충주의 호족 유긍달의 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소새으로 형 혜종과는 달리 탄탄한 권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며 처가가 후백제의 왕실이었고 동복 누이인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가서 전체적인 세력 기반만 놓고 보면 혜종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이복형인 혜종이 이른 나이에 붕어하자 종실 세력의 거두였던 왕식렴과 서경 세력의 지지를 얻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정종은 즉위한 아래로 붕어할 때까지 정적들의 힘을 억누르고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정착을 위한 개혁에 힘썼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즉위 이후 개국공신인 박술희를 살해한 죄와 반역을 꾀한 죄 등을 물어서 왕규 일파를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정적 처리 과정에서 왕규가 세력을 모아 반란을 꾀했고 이를 진압할 때 지나칠 정도로인명을 살상하여 개경 세력들과의 사이가 나빠졌고 무엇보다 개경 백성들의 불만을 사서 민심마저 악화되고 맙니다. 

 

 

 

이런저런 개혁이 연이어서 실패하자 정종은 마음이 약해졌는지 즉위 과정에서 인명을 지나치게 살상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재위 3년차인 948년 9월에 동여진 대광이 와서 특산물과 말 700여 마리를 바쳤습니다. 정종은 당시 본궐의 정전인 천덕전에서 그를 맞이하여 은, 면포, 비단 등을 하사했습니다. 조공품과 하사품을 교환하던 중 갑작스레 천동번개가 치며 비가 내렸습니다.

 

정종의 신하들과 물품들이 번개에 맞고 천덕전의 서쪽 부분이 번개에 맞으니 정종은 크게 놀랐고 당장 편전인 중광전으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정종은 그만 큰 충격을 받아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자신의 후원자였던 왕식렴이 사망하자 상심이 커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재위 4년만인 949년 3월13일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정종의 요절과 관련해서 후에 광종이 되는 친동생 왕소와의 대립 끝에 시해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외가는 같았을 지언정 정종의 후견인이 황식렴 등 서경 세력이었던 반면 광종의 뒷배경은 처가인 황주 황보씨였고 이들이 연계되어 서로 갈등을 빚었다고 보는 설입니다. 정확히는 아내의 외가, 광종의 아내 대목왕후 황보씨는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딸로 외가의 성을 따랐습니다. 실제 후에 광종은 태조의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아우인 왕욱의 아들 자신의 조카인 성종을 사위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알려진 기록과는 달리 박술희를 암살 한 것도 그이고 반란의 주동자로 알려졌던 왕규를 처형한 뒤 그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웠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비록 왕규가 혜종 대에 반역을 꾀하고 박술희를 모함하여 유배보낸 뒤 왕명을 사칭하여 유배지에 머물던 그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이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듭니다.

 

 

 

왕규와 박술희 모두 선왕인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혜종을 모시던 고명대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술희는 몰라도 왕규는 조금 애매합니다.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와 왕소를 죽이자고 했으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등 왕규의 뜻과는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나중에 혜종이 병에 들자 박술희와 왕규는 100여명의 호위병들을 이끌고 서로 대치하는 등 대립이 극에 달했습니다.

 

혜종이 붕어한 뒤 그의 세력 발술희,왕규까지 연달아 제압하고 임금이 되었건만 아이러니하게도 혜종과 똑같이 동생 때문에 환장하다가 허망하게 요절하는 비운을 맞고야 말았습니다.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광종 왕소가 적잖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를 제압하자니 기반이 만만치 않아 그조차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왕규까지 반란을 일으키니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정종이 각종 반란을 때려잡고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박살내려고 별의 별 짓을 다했으나 허망하게 요절하면서 광종이 그 덕을 보게 되었습니다. 정종의 후견인이던 왕식렴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으니 광종은 더 좋게 되었습니다. 광종에서 비판적이었던 최승로는 비슷하게 피의 숙청을 한 정종에게는 우호적이였습니다. 고려 왕씨가 계속 왕위를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은 광종이 아니라 정종의 공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비록 요절하고 무리한 서경천도를 벌여 민심의 이반을 불러오기는 했지만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