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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 고려 2대 왕위에 오르다

Condor-K 2021. 5. 15. 14:08

고려의 제2대 황제이며 후백제에서 태봉으로 전향한 나주 사람 장화왕후 오씨 소생으로 태조 신성대왕의 장남이자 공인된 후계자였습니다. 왕건을 따라 여러 전장을 누비며 후삼국 통일에 무공을 세우기도 했고 아버지 왕건의 고려 창업에 전공을 세웠던 엄연한 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짧았던 재위 기간과 미약한 권력으로 인해 후대에 나약한 임금이었다는 오해를 자주 받지만 태조 왕건의 적통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른 혜종의 위상은 남다른바가 있어 먼 후손의 예종, 공민왕이 제작한 태묘악장에서 어느 왕들보다 칭송을 받았습니다.

 

 

 

혜종은 성품은 인자하고 부드럽고 지혜로웠다고 하지만 본인의 암살 시도 이후 불안감이 절정에 달해 조울증 증세도 보였습니다. 공식모효는 혜종입니다. 혜종은 태조의 공인 후계자란 나름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종 대에 고려왕실의 오묘제를 시작하며 태묘를 건설했는데 이 때 왕조를 세운 태조는 기본적으로 불천위에 모셔졌고 태조 이외에도 왕조의 멸망을 막거나 흥성을 가져오는 등 왕조에 크나큰 공과 덕이 있는 임금들의 경우에는 종묘에서 옮기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에 올랐습니다.

 

혜종은 고려의 건국군주 왕건의 장남으로 왕건이 아직 태봉 궁예왕의 신하일 때 태어났습니다. 그 해는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 지 1년이 지난 해였고 왕건은 정기대감 직을 받아 전선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선대 태조 왕건은 통일신라 시대 송악에서 태어났으므로 혜종은 역대 고려 왕 중 유일하게 후삼국시대 태봉에서 태어난 왕입니다. 혜종은 1명의 왕후, 2명의 부인, 1명의 궁인을 아내로 두었습니다. 2명의 아들, 3명의 딸이 있었고 왕후는 의화왕후입니다. 혜종을 지지했던 개국공신인 왕규의 딸입니다. 고려사 기록으로 딸이 셋 있는데 각각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 후광주원부입니다. 

 

그가 6살일 때 아버지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세우며 혜종은 왕자가 되었습니다. 9살이 되던 해에 왕건은 그를 정윤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미약한 것을 두고 후계자 자리를 노린 호족들의 반발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후백제와 마지막 전투를 시작하기 위해 24살의 젊은 정윤은 직접 보병 및 기병 만명을 이끌고 선봉대로 나아가다 아버지가 죽고 31살에 대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혜종이 후삼국 통일의 천후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전공을 세울 정도로 전장을 누비며 후삼국 통일에도 공헌을 했고 무엇보다 왕건의 장남이었기에 정통성 면에서는 건들 수 없는 왕재감이었지만 문제는 혜종의 외가인 나주 오씨가 아버지 왕건의 다른 처가들보다 세력이 미약한 탓에 혜종이 늘 정적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지내야 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건 아니고 혜종의 외가는 나주에서 꽤 떵떵거릴 수 있는 집안이긴 했지만 왕건의 나주 상륙 작전 때도 그 지역의 호족들을 대표해 내응할 정도였고 이미 사실상 왕건의 장인이었던 정주의 대호족 류천궁이 내심 반발했을 텐데도 딸을 왕건의 첩도 아닌 둘째 정실 부인으로 당당히 밀어넣을 수 있을 정도의 권력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후삼국시대 막판에는 견훤이 나주를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나중에 후백제를 멸하고 나서 되찾고 나름대로 복구했겠지만 후삼국 통일부터 혜종의 즉위까지 겨우 7년이었는데 완전히 회복이 되었을지는 의문입니다. 후삼국시대 초반 이후로는 후방이라 전란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패서 같은 동네보단 확실히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해종의 권력은 그 태생적인 한계로 인하여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혜종 개인은 능력있는 인물이었지만 뒷배경이 약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족 세력이 강했던 시기에서 왕무의 외가의 실세가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그를 위해 적절한 후견인을 지정해주지 않았는데 혜종이 장자이기 때문인지 결혼시켰지만 아무래도 경순왕과 결혼한 낙랑공주의 영향력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건이 왕식렴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이나 개경 및 황주 등의 패서계 호족들 구 신라 왕가 세력이나 박영규로 대표되는 후백제 세력등 마음만 먹으면 쟁쟁한 후견인을 얼마든지 설정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박술희 한명만 붙여줬을 뿐입니다. 왕건이 붕어 직전 당시 옆에 있던 재상이었던 왕규, 염상, 박수문에게 안팎의 중요한 일들 중 오랫동안 결정짓지 못한 것은 경들이 혜종과 함께 처결한 후 보고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비운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문종의 경우처럼 병약했던 군주로 알려져있으며 실제로 그는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던 만큼 강인한 무골이였습니다. 자신을 시해하려던 자객까지 맨손으로 잡을 정도로 강인한 무골이었지만 재위 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사게 됩니다.

 

이런 오해로 자객이 혜종에게 가까이 갔는데 깬 혜종이 놀라서 발버둥치다 우연히 자객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은 채 덮어 두었는데 그의 왕권이 매우 미약하고 불안정했음을 방증하는 부분입니다. 왕이 시해당할 뻔했는데 이 중차대한 사건을 그냥 넘기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조사를 시작하면 혜종의 시해를 주도한 호족들이 불안해져 반란을 일으킬 공산이 컸고 혜종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호족들의 반란을 제압할 힘을 지니지 못했던 탓에 덮어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후백제와의 전투 중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고 이로 인해 공황장애를 앓았을 것이 다는 추측합니다. 후백제에 나주가 함락되면서 그의 외가의 힘이 더욱 약화되면서 혜종이 심적으로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던 원인으로 추측됩니다. 나주 오씨 집안은 탈출하여 멸분지화를 피했다는 기록도 있고 실제로 나주 오씨 가문은 아직까지 존속되고있습니다.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외가가 몰락한 혜종은 상대적으로 동생들에 비하여 외척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체는 강건했지만 심성이 선하고 유약하며 권력 기반이 약했던 탓에 쉽사리 정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고 자신의 장인인 왕규의 음모에 휘둘렀고 동생들의 권력 다툼을 외면하고 방치한 채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붕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여러번에 걸쳐 암살될 뻔한 전력이 있었으며 또한 건강하였던 그가 아무런 징후 없이 갑작스레 붕어했기 때문에 그의 이른 붕어를 호족들에 의한 시해로 보기도 합니다.

 

945년 10월 23일 고려 본궐의 편전 중광전에서 붕어하였습니다. 혜종이 봉어한 바로 그날 이복아우 왕요가 군신의 추대를 받아 왕위를 있게 됩니다. 혜종의 아들 흥화군은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과 함께 광종 연간에 벌어진 숙청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고 딸 경화궁부인은 광종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다른 자식들은 모두 요절했는지 뚜렷한 기록은 없고 경화궁부인은 광종과의 사이에서 후손을 두지 못했기에 혜종의 후대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