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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의 초대 황제 왕건

Condor-K 2021. 5. 14. 09:57

태조 왕건은 고려왕조의 창업 군주이자 초대 황제입니다. 신라 문무왕에 이어 두번째로 한반도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지도자입니다. 왕건은 877년 송악에서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장수로서 나주를 점령하고 나주 호족들을 모두 복속시켰습니다. 후백제는 이후 전략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후고구려의 영토는 넓어졌고 곳곳에서 왕건은 공로를 세웠습니다.

 

 

 

궁예의 총애를 받으면서 913년 37세의 나이에 2인자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918년에 궁예가 폭정으로 인심을 잃은 뒤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고 궁예를 축출하고 제위에 올랐지만 후삼국을 통일 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936년 견훤을 데리고 후삼국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이겨 삼한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신라가 골품제를 유지하며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을 동화하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고려는 골품제를 혁파하고 이들을 결속했습니다. 중국 대륙의 분열을 뛰어난 외교력으로 헤쳐나가 중국이 고려를 무시하지 못했으며 한반도인들이 단일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왕건의 먼 조상은 고구려 유민출신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왕건의 출신지인 송악군은 장수왕의 475년 한성 함락 사건 이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가 거의 200년동안 영토로 경영했던 곳이 였습니다. 고구려가 망한 뒤로도 732년까지 신라가 당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직접 지배하는 군현으로 편재하지 못한 지역이었고 초중기 고려보다도 통일신라가 유독 황해도 일대만 그렇게 못했기에 해당 지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도 정치적 자율성과 고구려 정체성 보존에 더욱 수월한 환경에 있게 됩니다. 고구려 유민들이 집단 탈주했을 당시 고구려인 정체성을 가진 속말 말갈인들 고구려의 고토로 복귀했었으나 백산 말갈인들은 대조영 집단과는 달리 당나라와 목숨 건 전쟁을 당나라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잔류한 고구려인들과 함께 신라의 간접적 영향력으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고구려의 옛 수도권으로 복귀하는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합한 일목대왕 궁예는 그들을 우대하기 위해 국호를 고려하고 하였습니다.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을 감수하면서 별도의 국가 체제를 갖출 생각은 하지도 않은 패서의 고구려 유민들과는 정반대로 대놓고 국가 꼴을 갖췄던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철저한 탄압과 유민의 집단화를 경계한 조치 때문에 전라남북도, 원신라 지역으로 흩어져 강제사민당해서 고구려 유민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왕건의 먼 조상이 옛고려의 유민이라는 사서 상의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모든 정황으로 봐서는 고려의 후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왕건은 수군을 이용한 나주 전역뿐 아니라 내륙 전선에서도 활약해서 견훤의 출산지인 상주 전투에서 견훤과 여러차례 싸운 끝에 승리한 것을 필두로 여러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정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궁예로부터 왕에 다음 가는 지위인 시중 벼슬을 받았습니다. 시중이 되고나서 왕건의 인기는 늘어났는데 궁예는 이때부터 왕건을 본격적으로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아지태가 궁예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입전, 신방, 관서 등을 변역죄로 모함하여 그들이 하옥되자 왕건이 진상을 밝혀 궁예에게 알리니 세 사람은 무죄석방되며 아지태는 쫓겨났다고 합니다.

 

궁예의 막장 행보는 거세지고 왕건 자신에게까지 의심을 가질 낌새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위험을 직감했습니다. 벼슬에 연연하지 말고 일단 멀리 떨어지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나주 쪽의 정국이 불안하니 과거 나주를 빼앗았던 자기가 가서 지키고 싶다는 핑계로 대면서 시중 자리를 스스로 내놓은 뒤 나주로 가서 궁예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후에 궁에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큰 세력을 가진 호족들을 숙청하면서 뜬금없이 관심법으로 왕건의 마음을 꿰뚫어 역적 모의를 하고 있음을 았아냈다며 왕건을 압박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왕건은 스스로 역적모의를 인정하며 죄를 빌자 궁예는 정직한 사람이다라는 칭찬과 함께 처단한 역적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화 중 황금 안장과 황금굴레를 하사하면서 용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시중 벼슬에 있음녀서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세력가였으므로 자신도 궁예에게 숙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게 됩니다. 아내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했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습니다. 결국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6월 15일 철원성 포정전에서 고려 건국을 선포하여 연호를 천수라 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2세였습니다. 이듬해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천도하고 자신의 잠저 자리를 본궐로 증축했으며 천덕전이라고 하고 자신이 지은 발어참성을 도성으로 둘렀습니다. 

 

 

 

927년 견훤은 포위망을 우회해 서라벌을 기습 공격해 허를 찔렀습니다. 공산 전투 당시에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를 구워한다는 명목하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하였습니다. 견훤의 계략으로 급히 추격해오던 왕건의 군대를 매복술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습니다. 고려 건국 후 국내 상황 역시 왕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궁예를 따르던 몇몇 성주들과 호족들이 고려에 귀순하기를 거부하며 내전이 발생하였습니다. 공산 전투 패배 이후 왕건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후백제와 국운을 건 전투를 수차례 벌였으나 공산 전투에서 입은 왕건의 피해가 워낙 커서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아 929년 12월에 벌어진 고창 전투의 서막인 저수봉 전투의 대승리 이전까지 3년여간을 계속해서 수세를 몰리게 됩니다.

 

왕건은 한때는 원수였던 견훤을 상보 어르신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상보라는 호칭을 처음 쓴 것은 인질을 교환해 화친을 한 후로 이때는 손위의 큰형님이나 작은 숙부 정도로 대한 것이 었습니다. 왕건이 장남을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한 것은 장남을 무시하였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일생의 라이벌 견훤의 선례를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왕건은 이념과 시대에 관계없이 평가가 매우 긍정적입니다. 분열된 후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1945년 남,북한 분단 직전까지 천년이 넘게 이어지는 단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게다가 외세에 의존했던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했고 궁예, 견훤과 마찬가지로 능력과 세력이 있으면 어느 지방의 사람이라도 고위 관리가 될 수 있는 이른바 중앙과 지방 간 기회의 평등을 나눌 수 있는 시대를 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